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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야기

역사속 청렴 인물(박팽년)

  • 3146
  • 2017-03-06

역사 속 청렴 이야기 일곱 번째, 박팽년

 

 

박팽년(1417~1456)은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세종 당시의 대표학자라 할 수 있다. 성 삼문과 더불어 일찍이 집현전에 발탁되어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그는 성품이 올곧고, 침착하며 항상 주변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부끄럽지 않은 관직생활>

박팽년의 관직생활은 검소와 청렴 그 자체였다. 그는 관직생활을 하면서 받은 녹봉으로 생활하며 남에게 신세지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서울 근교에 조그만 전답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그의 친구가 하루는 박평년을 찾아와 녹봉만으로도 먹고 살 수가 있는데 어찌하여 전답까지 필요한가?”라고 되물었다. 이 같은 물음에 박팽년은 크게 부끄러워하며 바로 그 전답을 처분하였다고 한다.

<박팽년의 인품>

선조대왕이 하루는 조정의 대신들을 모아 놓고, “옛날 박팽년은 그가 천거하여 벼슬을 시켜준 친구가 밭을 주려고 하여도 그가 친구 간에 주고 받는 것은 비록 거마(車馬)라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옛글이 있지만 혐의스러우니 받을 수가 없다하면서 거절하였다고 하니 이것은 가히 청렴이다라 그를 일컬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인품을 크게 치하하며 그 자손까지 관원으로 임명토록 하라는 전교(傳敎)를 내렸다. 이에 따라서 박팽년의 현손(손자의 손자) 박계창(朴繼昌)이 소격서(昭格署) 참봉(參奉)에 임명됨으로써 그의 후손은 비로소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 뒤 숙종은 다시 그의 누명(陋名)을 벗기고 관직을 복구시켜줌과 동시에 충정(忠正)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려 그의 절의를 표창하였다.

 

<시조>

금생려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나며

옥출곤강(玉出崑岡)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날쏜야

암으리 사랑이 중타 한들 님 마다 쫓을 소냐.

이 시조는 옥중에서 그가 세조의 회유책에 대항하여 쓴 것으로, 임금을 섬기되 분별없이 여러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국가표준영정 제 81호(윤여환 교수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