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5인조 밴드 ‘4(死)번 출구’

지난 15일 오후 7시 서울 개포동 강남장애인복지관 2층 밴드 연습실. 한찬수씨(49)가 지팡이로 땅을 짚어가며 들어섰다. 한씨는 시각장애 1급으로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가 기타를 챙겨 자리에 앉자 밴드 ‘4(死)번 출구’의 연습이 시작됐다. 2대의 기타와 베이스기타, 건반을 연주하는 4명의 손 끝에서 포크송 ‘젊은 연인들’의 선율이 흘러나왔다. 연습곡에는 트로트 ‘무조건’부터 하드록 그룹 스콜피온스의 ‘홀리데이’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가 담겨 있다.

‘4번 출구’는 1~3급 시각장애인 5명으로 이뤄진 밴드다. “죽음과도 같은 장애의 고통에서 빠져나가자”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2005년 같은 복지관에 다니던 시각장애인들이 모여 ‘실로암 밴드’를 결성한 후 2006년 3월 이름을 바꿨다. 한씨는 “공교롭게 연습실도 지하철 4번 출구, 멤버 중 4명이 사는 곳도 지하철 4번 출구 앞”이라며 웃었다.

이들은 18일 서울시에서 장애인의 날(20일)을 맞아 여는 청계천 개성마당 축제에서 노래를 부를 예정이다. 공연 일주일 전부터 매일 2~3시간씩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4번 출구’ 연습실에는 악보가 없다. 새로운 곡을 연습할 때마다 원곡을 수십 번 들어보고 머릿속에 악보를 그려 외운다. 김남동씨(34)는 전자기타의 음향효과 스위치를 모두 외워 자유자재로 음색을 바꿔가며 연주했다.

키보드 주자 윤형진씨(27)는 음색을 바꿔야 할 때마다 키보드 1㎝ 앞까지 코를 박았다. 운율에 맞춰 이리저리 움직이며 기타를 치다 옆의 키보드나 다른 멤버에게 몸을 부딪치는 일도 있다.

이들은 “음악에 시각장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씨는 “우리 사전에 악보는 없다. 음악이라는 건 감과 귀로 하는 것”이라며 “느끼는 대로 연주하고 악보에 얽매이지 않아 오히려 편하다”고 말했다.

베이시스트 고재혁씨(32)는 “마음을 비우고 음악에 집중하면 문제없다”며 “음악은 소리니까 눈이 보이지 않는 게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어느덧 활동 4년째. 그동안 이들은 ‘출구’를 찾았을까. 한씨는 “음악을 통해 확실히 출구를 찾았다”고 했다. 그는 망막색소변성증으로 2003년 시력을 잃었다. 18년 동안 근무했던 직장도 그만둬야 했다. 그는 “괴로웠지만 그 덕분에 취미로 하던 음악이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면서 “앞으로도 쭉 음악과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씨도 한씨와 같은 병으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아직 사물의 형체 정도는 분별할 수 있지만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지만 지금은 안마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장애인 공무원 특채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는 “멤버 모두 눈 때문에 상처받고 고통스럽게 살아왔지만 음악을 만나면서 꿈을 갖게 됐다”며 “언젠가는 원래 꿈꾸던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은 절망 속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출구를 찾아주고 싶다고 했다. 윤씨는 “장애인이든 아니든 힘들고 어려운 상황의 사람들이 우리 연주를 듣고 희망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의 올해 목표는 ‘단독 콘서트’다. “그동안 장애인단체가 주관하는 행사 무대에 주로 나갔는데 이제는 단독 콘서트를 해보려고 해요. 장애인을 위한 자선 콘서트를 세종문화회관처럼 큰 무대에서 하는 게 우리 밴드의 꿈입니다.”(한찬수씨)

출처 : 경향신문 / 유정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