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서 딸로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

세계일보 | 기사입력 2007-06-21 11:15



“남성도 가부장제에 눌린 피해자예요.”
20여년 전 페미니즘 소설 ‘절반의 실패’에서 여성의 궐기를 외쳤던 작가 이경자(59·사진)는 이제 날카로운 공격성을 접었다. “남성주의 세상을 뒤엎자”는 투쟁구호 대신 강한 척하느라 고생하는 남성에게 연민을 보낸다. 그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제대로 이해하기만 하면 가부장제로 인한 억압과 갈등은 사라진다”며 “남자들이 생각하는 여성상이 진짜 여성과 동떨어져 있다는 게 비극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최근 그는 여성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돕는 ‘딸아, 너는 절반의 실패도 하지 마라’(향연)를 펴냈다. 한국 사회에서 딸로, 어머니로 살아온 작가가 연애·결혼·출산·이혼·노년생활을 겪으며 느꼈던 소회를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고백한다. 페미니스트의 도전적이고 예민한 문제 제기는 찾기 어렵다. 작가가 설명했듯, 책은 “푸근한 할머니가 들려주는” 여자의 일대기이자 양성 조화법이다.

“남녀가 똑같이 가사분담을 해야 한다는 신념은 변함없어요. 단지 예전엔 전투적인 말투로 남성들을 자극했지만 이젠 부드럽게 설득하지요. 남성에게 여린 면이 있고, 사나이도 요리 같은 여성적인 취미를 즐길 수 있다고 웃으며 말해 줍니다.”

그는 남성의 각성을 일방적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 사회에서 여성 잔혹사가 끊이지 않는 배경엔 여성 자신의 모순도 숨어 있다. 아들을 낳아 ‘권력의 대리인’이 되려는 욕망, 모성애란 이름으로 자식에게 행하는 속박, 한 남자를 독점하려는 왜곡된 사랑 등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계를 지적한다.

“여성들이 스스로 모순점을 직시하는 게 절실합니다. 원인을 정확히 아는 것만으로도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니까요.”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까지 숱한 시행착오와 아픔을 겪었다. 28년간 유지해 온 결혼생활을 끝내고 이혼한 것도 큰 상처였다.

그는 “운명이 여성을 대변하라고 이끄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의 어머니는 딸부잣집의 거추장스러운 딸이었고, 그도 딸 둘을 두었다.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며 단맛 쓴맛을 빠짐없이 맛봤다. 산전수전 겪고 난 뒤 남성과 여성의 실체가 한결 잘 보인다. 이제 그는 자신을 페미니스트가 아닌 인간주의자라 불리길 원한다.

“전 남녀 사이의 산술적인 평등을 믿지 않아요. 남녀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 차이를 받아들일 때 여자와 남자는 서로 행복해지고, ‘절반의 실패’를 피할 수 있습니다.”

글 심재천, 사진 송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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