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민, 김태화, 은유영
< 내 마음의 평온을 찾아서 >



 
■전시 개요

 - 전 시 명 : 《 내 마음의 평온을 찾아서 》

 - 전시 작가 : 김규민, 김태화, 은유영

 - 전시 일정 : 2022년 9월 7일(수) ~ 9월 28일(수)

 - 장 르 : 자수, 자개, 회화

 - 전시 장소 : 슈페리어 갤러리 제1전시관







■전시 서문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을 접하다 보면 일그러진 마음이 나의 일상까지 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이런저런 불완전한 부분이 있지만, 결국 사람들은 무심하게 살아갑니다. 슈페리어갤러리에서는 혼란스러운 현대사회에서 평온을 구하는 이들에게 치유와 힐링의 메시지를 담고자 각 재료의 물성을 이용하여 오랜 시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변화를 작품의 정체성으로 보여주고 있는 작가 3인 특별전을 선보입니다.

작가 김규민은 실과 바늘을 잡고 마음을 다스리는 자수 작업을 통해 오방색 실을 하얗게 덮었다가 다시 되살리고 덮기를 계속 반복하여 마음의 평정심을 얻는 자신만의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선보입니다. 중복적인 행위는 감정의 반복이자 만나고 헤어지는 유기적 관계를 의미하며 행위를 통한 의도치 않은 결과는 회화와는 다른 각도로 다가와 직접 눈으로 감상할 때의 묘취가 있습니다. 이러한 중첩의 작업은 그 끝에서 온전한 나와 마주하게 되며 내면의 평온함을 이끌어내며 희망의 빛을 다듬어 추상의 결과물을 얻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작가 김태화는 실제지만 실제같지 않은 풍경들을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바탕으로 경계면에 대한 사유를 풍경으로 자연스럽게 풀어냅니다. 그는 한지를 붙여 그리고 난 후 뜯어내고 다시 캔버스에 작업하는 방식으로 우연성을 자연스레 끌어내 동양화인지 서양화인지 모를 모호한 그 경계로 감정을 토해내며 작품을 표현합니다. 작가가 표현하는 이미지들은 삶의 경험이고, 기억이고 그리움이며 이야기들이며 관람자에게 그리운 자신의 경험 이야기들을 끄집어 내도록 유도합니다.

작가 은유영의 신비로운 색감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공간감을 작품 속에 표현하고자 자개를 잘게 조각내어 자개를 원형이나 사각형의 화면에 규칙적으로 붙임으로써 쌓고 쌓는 인고의 시간들을 그려냅니다. 소재와 색채를 통해 빛의 산란을 형상화하며, 그 자개의 표면은 마치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느낌을 자아내 보는 이로 하여금 잔상을 유도합니다. 그 빛과 시선이 작업의 표면에 맺히도록, 시시각각 변하는 그것의 순간을 붙잡아 재현하려 작가의 시도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각기의 재료에 있어 완결된 형태로 형상을 구축하는 인고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우울과 불안에서벗어나 마음의 자유를 누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마음의 평온과 안식을 얻을 때 진정으로 나의 삶을 살 수 있음을, 구하는 이들에게 슈페리어갤러리에서 크게 숨쉬며 한참을 머물다 평온을 찾고 돌아가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랍니다. 《내 마음의 평온을 찾아서》 전시는 오는 9월 7일부터 9월 28일까지 진행됩니다.




■작품 이미지


김규민_Pray_coton, traditional Korean paper,acrylic,embroidery_60x60(cm)_2022


김규민_Timeless_coton, traditional Korean paper,embroidery_65X65Cm_2022


김태화_nostalgia_Acrylic on Canvas_150x150(cm)_2022


김태화_nostalgia_oil on canvs_100x100(cm)_2022


은유영_ The Light Inside Ⅰ_acrylic, pearl powder, mother-of-pearl on wood _45.5x53.0(cm)_ 2019


은유영_Just When The Twilight Started_acrylic, pearl powder, mother-of-pearl, urethane on wood_53.0x45.5(cm)_2019






■Artist CV

김규민 / Kim Gyu Min / 1977년생

학력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섬유예술과 및 동대학원 졸업

개인전 
‘CUBE’ (인사갤러리/서울) 
‘INNER PEACE’ (스페이스 오메/ 서울) 
‘MODERN EMBROIDERY’ (연우재/ 서울) 
‘SILENCE’ (edition de Jeju/ 제주) 

단체전
제 8, 9, 10, 11회 이화섬유전 “실과 바늘의 작업"전 
제 2회 이화섬유예술전 “NOW…” (한국문예진흥원 미술관/ 서울) 
제 30, 31회 한국공예가협회전 (예술의전당/ 서울) 
우수청년작가전 (갤러리 가이아/ 서울, ZONE CHELSEA CENTER FOR ARTS/ New York)
2020 공예주간 “자수공간" (온양민속박물관 구정아트센터/ 온양)
2020 공예트랜드페어 “자수잔치" (코엑스/ 서울) 
2021 공예주간 “자수살롱" (스페이스 오메/ 서울)
2022 “자수오디세이" (롯데갤러리/ 인천)

수상
제16회 무등미술대전 입선 (광주시립미술관/ 광주) 
제28회 동아공예대전 입선 (일민미술관/ 서울) 
제20회 대한민국미술대전 공예부문 입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제2회 한국공예대전 특선 (솜리문화예술관/ 익산) 
제3회 청주국제비엔날레 동상 (청주 예술의 전당/ 청주)


김태화 Kim Tae Hwa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회화과 졸업

개인전 
2021    제8회-중정 갤러리
2018    제7회 갤러리 아트리에
2016    제6회 호감 갤러리
2011    제5회 이랜드스페이스
2010    제4회 바움 갤러리
2008    제3회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2007    제2회 미술공간 현
2004    제1회 갤러리 숲
    
단체전
2019   유위와 무위 / 아정미술관
2017    now and here / 슈페리어갤러리
2017    공감의 공간(空間), 위로를 나누다 / 슈페리어갤러리
2016~21    아름다운 화실 / 슈페리어갤러리
2015    아름다운 여행 / 오챠드 갤러리
2013    한민족국제미술교류전 / 갤러리 아래아
2012    adagio non molto / EON 갤러리
2011     사월에는 / 갤러리 숲
2011     Art of Life전 / 가가갤러리 
2009    홍익대학교 동문전 /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2009    썸머타임전 /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2008    북경2인초대전 / 스페이스 다 갤러리(중국 북경)
2008    한·중·일 국제교류전 / 칭화대학 (중국 북경)
1998    순수현실 - 메타포전 / 백송 갤러리
1997    조망과 도약전 /  은하 갤러리
1996    우리 미술의 정서전 / 서경 갤러리
1994    오월의 만남전 / 소나무 갤러리
1993    오늘의 판화 청년작가전 / 코스모스 갤러리

아트페어
2021    부산국제화랑아트페어 / 벡스코
2019    성남아트페어 / 성남아트센터 808갤러리
2015    대구아트페어 / 대구 엑스코
2013    서울리빙디자인 페어 / 코엑스


은유영 /  Eun,Yuyoung / 1981년생

학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회화과 석사 졸업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회화과 박사 재학

개인전
2021 A New Earth, topohaus, 서울 
2021 Eternal Now_영원한 현재, 아트비트 갤러리, 서울 
2018 빛의 기하학, KSD갤러리, 서울
2017 Radiance, 레빗홀, 7pictures, 서울 
2015 The Mourning Forest, 사이아트 스페이스, 서울 
2010 From a Distance,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서울 
2008 사막의 집, 갤러리 헛, 서울

단체전
2022 Multiverse, 갤러리박영, 파주
2021 PYAF, 아트스페이스 KC, 판교
2020 황금삼각형, 아터테인, 서울 
2019 Virtul Memory, 대안공간 루프, 서울 
2018 New Thinking, New Art, 리서울 갤러리, 서울 
2017 도시락 (圖示樂), 미술터미널 작은미술관, 정선 
아트경기, 벨라시타, 고양 
Retrace with drawing, 갤러리 엘르, 서울
공모선정작가전, 갤러리 라이프, 서울 

주요 소장처(기관) 
한국산업은행, 박영장학문화재단





■ 작가노트, 작가평론글

작가노트

김규민

나에게 자수라는 기법은 참으로 매력적인 표현의 도구이다 실이 캔버스를 통과할때 내는 마르고 거친소리, 실과 실을 묶고, 그위에 물감을 칠하는 모든 작업과정은 복잡한 생각이 조용히 정리되길 바라는 나의 소망이 담겨있다. 캔버스에 자수를 놓는 모든 순간이 나에게는 명상의 시간이자 기도의 시간이다. 이런 반복적인 행동을 통해 화면은 점점 실로 가득 차지만 나의 내면은 점점 투명해짐을 느낀다. 타인과 맺고 있는 수많은 인연을 상징하기도 하는 나의 작품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여러 인연과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맺게되는 관계맺음의 의미를 되돌아보게한다. 실을 바늘에 꿰어 천에 엮고 다시 실과 실을 묶는 복잡하고도 단순한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이미지와 마주하게 된다. 자수로 표현하는 이미지는 평면에서 표현하는 여타의 미술 작품들과는 다르게 평면에서 부조.. 더 나아가서는 입체조형물까지 기존에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의 질감과 다양한 표현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다. 실로 그림을 그리고 또 물감으로 실을 칠하고, 그 위에 다시 실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 속에서 나는 내 안의 복잡한 생각들과 다양한 감정들을 하나씩 꺼내어 나열하고 그것들을 천천히 정리해 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평정심을 찾게되고 그 끝에서 온전한 나와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작품 속에 나의 마음, 그 마음을 담은 집 한 채를 짓는다



김태화

풀들의 풍경
 -바랭이와 개망초 사이에서

    
 풀에 관해 말하는 것은 어렵다. 그리는 것도 어렵다. 문화적으로 너무 많이 소비되어서이다. 바람에 눕는 김 수영의 풀에서,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까지 가야하는지 알 수도 없는 역사의 먼 저곳에서 풀과 잡초에 대한 미술과 시적 변주가 시작 되기때문이다. 그 이유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풀이 정서적 울림과 조형적인 흡입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김 태화도 풀에 홀렸다. 개망초와 바랭이, 호박, 포도 넝쿨에 발목 잡히고 붓이 얽힌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어려서부터 그 잡초들을 보고 자랐으니까. 보고 자란 정도가 아니라 함께 뒹굴고, 쥐어 뜯고, 맛 보고, 낫으로 베고, 긁히는 과정에서 몸에 스며들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김 태화의 풀은 그림 이전의 그 무엇인 것이다. 그것은 체험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거의 원초적인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사실 여름이 지난 뒤 가을 풀과 덩굴들은 바라볼 때는 몰라도 야산이나 시골길에서 만나면 꼭 반가운 것은 아니다. 도깨비바늘과 도둑놈의 갈고리 류는 옷과 머리에 마구 달라 붙고, 덩굴들은 손등에 생채기를 내고, 멀대같이 웃자랐던 명아주풀이나 개망초 줄기는 발길을 막는다. 그 과정에서 풀과 사람은 만난다. 더 없이 육체적으로. 그것은 일종의 각인이다. 풀과 사람이 한 세상 같이 살고 있다고 서로의 몸에 찍어주는.

 김태화의 그림은 그래서 단순한 관조나, 바라봄이 아니다. 미술의 다른 분야, 특히 사진의 경우 잡초와 덩굴 풀을 희미한 톤으로 찍어내는 것이 유행인 시절이 있었다. 그 흐름은 지금도 나름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지만 김태화의 그림은 그와는 전혀 다르다.  겉보기에는 그와 닮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내부에는 풀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 차이는 체험의 차이에서 시작해서 심미적 차원으로 확대된다. 전자가 감상적이고 애매한 미적 취향을 바탕으로 풀을 해석한다면 김태화는 풀에 대한 입체적인 생생함을 바탕으로 조형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문학과 미술의 영역에서 풀과 잡초는 생명력, 끈질김, 민중 등등의 이미 만들어진 상징과 비유의 틀들이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견고하다. 견고함을 넘어 완벽한 스테레오 타입이 된다. 예술이 하는 일은 그 견고함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제 김태화는 그 견고함과 빤한 상징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어쩌면 넘어서라는 것은 일종의 내가 원하는 강요일 수도 있다. 왜냐면 미술 작품이란 무엇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관한 다른 차원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캔버스 위에 덩굴을 걸쳐놓고 작가는 뒤로 물러선다. 물러서서 붓자국을 본다. 한 쪽은 진짜 풀이고, 다른 한 쪽은 이미지다. 그 사이에 김태화가 있다. 그는 이쪽과 저쪽을 왔다 갔다 한다. 풀과 이미지 사이에서 어떤 닮음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몰입의 상태가 된다. 그 몰입은 모든 것에 대해 판단 정지 상태가 된다. 그 순간 붓은 풀이 되었다가 다시 붓으로 되돌아 간다. 물론 이것은 내가 눈으로 보는 것이며 동시에 상상이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그 찰나, 붓질의 짧은 호흡속에는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언젠가 케네드 클락이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 앞에서 어느 정도 다가가면 대상이 이미지가 아니라 그냥 물감의 상태이고 얼마만큼 물러나면 그림, 즉 이미지가 되는 가를 살피느라 왔다 갔다 했다고. 그리고 그 순간을 포착할 수 없었다고. 물론 김태화의 그림은 벨라스케스식의 회화성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는 풀의 줄기와, 마른 덩굴과 잎사귀들을 붓으로 쓰다듬는 것처럼 접근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려진 개별적인 풀 하나 하나의 모습은 하나나의 풍경이 된다. 풀들의 풍경.

 풀들의 풍경은 곧 세계의 풍경이다. 개별적인 풀들과 풀들이 모인 사이에 캔버스가 있다. 풀들은 한 개씩 캔버스 위에 모인다. 나란히 늘어서기도 하고, 서로 얽히고 뒤섞인다. 그리고 풍경을 이룬다. 이룬 풍경들을 뒤로 물러서서 바라본다. 캔버스 속에 풀이 있고, 풀들의 풍경이 있고, 캔버스 밖에는 서울이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김태화의 그림은 현실에 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현실에 대해 말 한 것이 된다. 물론 그 현실이 어떤 것인지는 아직은 애매하다.
 모든 시작은 쉽지않다. 풀과 덩굴의 가을은 김태화 그림의 시작이다. 앞으로 어느 쪽으로 그의 붓이 길을 만들어갈지 알 수 없지만 이미 길은 시작 되어버렸다. 그리고 김 태화는 그 길을 멀리 가야할 것이다. 오래 된 풀들의 풍경 속으로. 






은유영

“저의 회화는 무한/영원과 현재/찰나가 만나는 장소입니다. 저의 작품에서의 자개는 가시광선 즉 무지개 빛으로 끊임없이 파동을 일으키면서 존재합니다. 관람자는 저의 회화에서 저마다의 다르게 포착된 빛의 프리즘을 지각할 것입니다. 저의 작품이 그들에게 ‘직관적’으로 감각되기를 원합니다. 작품은 하나의 언어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비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회화는 역동적 ‘공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렇게 작품은 무한의 세계를 연결합니다. 그리고 다시 현재의 관람자를 비추게 됩니다. 화면의 반사가 관람자를 회화 내부로 초대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관람자와 작품이 서로 영향을 받으며 ‘공명’ 하기를 바라며, 마침내 관람자가 창조의 주체자가 되고 작품이 그들에 의해 새로운 세계 (우주)가 만들어 지기를 기대합니다. “  _작가노트

“빛, 반사 재료, 간섭색(interference color), 형광색(fluorescence color)를 사용하여 특정 조건에서 관객이 빛과 기타 감각 현상을 경험하도록 했다. 작품을 대면하면 반사되는 표면으로 인해 보는 사람의 신체와 화면이 동시에 들어온다. 작품은 그 내·외부가 관람자의 신체를 매개로 관계 맺고, 그 시각적 중심이 교차하다가 작품 내부로 이동하게 된다. 작품은 몰입된 환경 공간에 놓여있고, 생동하는 물질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시각을 감각(신체, 촉각)으로, 다시 시각으로 왕복 순환한다. 작품은 서사도 대상도 없이 일루전을 품고 있는 하나의 오브제 또는 공간이다. 그곳에서의 역동(wave)은 정동(affect)이며, 순수지각이라 할 수 있다. 그 경험은 ‘찰나’ 이며, 짧게 ‘반짝’ 이는데, “인간이란 결국 별 먼지로 구성된 존재”로서, 우리가 존재하는 이 시·공간은 원자와 입자가 파편으로 부유하는 가운데서 조합된 ‘찰나’라고 생각한다. 작품에서 경험하는 그것은 우주적 시간이자 우주적인 만남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존재는 ‘우주적 존재’가 된다. “ _작가노트

“픽셀의 네트워크로 디지털 세계를 모두 표현해 내듯이, 세포의 네트워크로 무한히 다른 정보가 생성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회화가 관람자에게 현상학적으로 다가가 무한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바라기에 네트워크 network의 최소 단위를 화면에 표현하였습니다. 작품은 매끄러운 표면 질감과 색감, 산란하는 자개에 의해 인간의 감각 중의 긍정의 데이터를 공유하는 장소가 됩니다.  ‘매끄러움‘은 동시대의 미(美)입니다. 예컨대 현대인은 SNS에서 하루에도 몇 번 씩 반사된 자기 존재의 긍정성을 발견합니다. 지금은 하나의 목소리가 아닌 각자의 이야기가 있고, 그것이 네트워크로 모두 연결되는 시대입니다. 즉, 디지털에 의해 초연결(hyper-connected)사회가 된 셈입니다. 제게 영감을 준 명상 또한 신체에서 초연결을 경험하는 것인데, 그것을 표현한 나의 작품은 현실이 가상이 되고 가상이 현실이 되는 세계가 신체에 중첩하는 현상학적 장소가 됩니다. 관람되는 작품이 신체에 의해 반사되고, 중첩되는 체험은 관람자 각자의 상상력으로 마무리 됩니다. 작품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언어를 제시하거나 공간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마치 음소거되고 충전되며 색다른 느낌을 줍니다. 다만 감각에 접속하기를 기대합니다.” _작가 노트

Eternal Now 영원한 현재 
_작가 노트 (명상과 관련하여)


“아. 고귀하게 태어난 아무개여. 들으라. 이제 그대는 순수한 존재의 근원에서 나오는 투명한 빛을 체험하고 있다. 그것을 깨달으라.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그대의 현재의 마음이 곧 존재의 근원이며 완전한 선이다. 그것은 본래 텅 빈 것이고, 모습도 없고, 색깔도 없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참된 의식이며 완전한 선을 지닌 붓다 임을 깨달으라. 
그것은 텅 빈 것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 아니라 아무런 걸림이 없고, 스스로 빛나며,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텅 빔이다. 
본래 텅 비어있고 아무런 모습도 갖지 않은 그대 자신의 참된 의식이 곧 그대의 마음이다. 그것은 스스로 빛나고 더 없는 행복으로 가득한 세계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다. 그 하나됨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바로 영원히 변치 않는 빛 아미타바이다. 
그대의 마음은 본래 텅 빈 것이고 스스로 빛나며, 저 큰 빛의 몸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그것은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 ”
_파드마 삼바바, 『티벳 사자의 서』, 류시화 옮김, 정신세계사, 2020, 249~250쪽.


    ‘티벳 사자의 서‘는 죽음과 환생 사이인 ’바르도‘의 상태에 놓인 사자(死者)에게 들려주는 가르침이 적혀있는 오래된 책이다. 위에 글은 죽음의 순간에 나타나는 투명한 빛으로 사자(死者)를 인도하는 글 중 일부이다. 이렇게 사자(死者)는 안내문를 듣는 것만으로도 영원한 대자유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원서의 제목은 ’바르도 퇴돌‘이다. 여기서의 영원한 대자유는 공(空), 열반(nirvana)등의 궁극의 상태를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깊은 명상이나 기도를 하게 되면 선(禪)에서 말하는 사토리(순간적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의식 상태이라 할 수 있다. 이 때 존재는 ’근원의 빛‘을 체험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사토리를 ’삶 속의 짧은 죽음‘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이는 시적 죽음으로, 마음의 초월이다. 이 때, 궁극의 상태를 체험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의식은 모든 것의 경계가 사라진 자유롭고 순수한 상태이다.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상태로 영원하다. 무한의 우주(宇宙)가 그에게 펼쳐진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의 순간이다. 이내 곧 삶이 개입되어 오기 때문이다. 

   개인전, 「영원한 현재」는 ’사토리‘, 그리고 ’바르도 퇴돌‘을 시각적, 공간적으로 표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삶과 죽음, 몸과 정신, 찰나와 영원, 현재와 무한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무경계, 근원의 빛을 체험하는 공간이다. 그 구성은 간결하다. 이는 나의 회화가 감각으로 다가가기를 바라고, 공간과 관객의 존재로서 완결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작품을 대면하면, 반사되는 표면으로 인해 보는 사람의 신체와 화면이 동시에 들어온다. 작품은 그 내·외부가 관람객의 신체를 중개시키며 관계 짓고 있는데 그것을 바라보면, 시각적 중심이 서로 교차하다가 작품 속으로 이동하게 된다. 작품은 여러 겹(layer, 층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작품에서 먼저 보이는 것은 색이다. 주로 사용된 색면은 따뜻함. 포근함을 연상되나, 그것은 차라리 색보다는 ’빛‘에 가깝다. 우리는 무언가를 깨닫거나 알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 입가의 미소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지혜의 빛, 깨달음의 빛이다. 그리고 색면은 자개의 반투명함과 만나면서 베일을 지닌 채 시각으로 들어온다. 그 때 그것은 연한 베이비핑크(soft Baby Pink)나 연한 살구색(soft Tangerine Red)으로 보여지는데, 흡사 살(skin)을 떠오르게 한다. 그렇게 빛이 감각세계로 현전하게 되는 것을 화면에 담고자 하였고, 그렇게 시각적이기도 촉각적인 자개는 스스로 빛을 발산하거나, 빛에 의해 무지개빛으로 산란되기도 한다. 그리고 조금 더 시선을 내부로 향한다면 자개의 빛들 사이에서 부유하는 빛의 파편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나에 의한 장치이겠지만, 작품을 대면하면 시각은 한 번에 전체를 인식하거나 또는 각각의 층위를 인식하는 여행을 하게 됨은 분명하다. 이렇게 시선은 작품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갔다가 다시 외부로 이동하는 것을 반복하게 되는데, 이렇게 ‘봄’과 ‘보여짐’이 서로 교차 되다가 만약 한 순간, 감각의 현전을 느끼는 시적 순간이 열리게 됨을 경험한다면, 그 때는 경험하는 의식은 사라지게 되고 순수의식이 베일을 벗고 나타날 것이다. 

   현대인에게의 명상은 4차 산업혁명속에서의 디지털기기없이 신체에서 초현실(hyper-connected)을 경험하는 일이다. 나의 회화는 나의 명상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을 신체와 정신의 동시성과 합일을 레이어드(layered)하면서 ‘한 순간’의 ‘회화’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런 현실이 가상이 되고, 가상이 현실이 되는 세계가 당신의 신체에 중첩하는 작품이 「영원한 현재」이다. 그렇게 작품을 대면하면 태초의 ‘빛’이 당신이라는 존재에 아로새겨져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의 미소가 화답하기를! 바라본다. _은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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